2026년 현재는 블록체인 기술로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36년에도 블록체인 기술은 세상에 큰 변화를 가지고 왔을까요?
2036년 행, 타임머신 열차 출발합니다.
1. “아직도 종이돈을 쓰는 사람이 있나요?”
2036년. 가상의 인플레이션 취약 국가 주토피아의 한 환전소. 벌써 34년차가 된 주디는 서랍에서 지폐 감별기를 꺼내 벅스를 세기 시작했다.
“아직도 벅스를 쓰는 사람이 있다니”
그럴만한 일이었다. 인플레이션 취약 국가의 화폐인 벅스의 가치는 날마나 떨어졌고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상 벅스를 쓰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해서 모두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일상에서 쓰고 있다.
‘타다닥 타다닥’
주디는 지폐 감별기가 열심히 지폐를 세는 소리를 들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2002년, 주디는 스물두 살이었다. 그 해 주토피아는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은행은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들은 평생 모은 예금을 인출하지 못했다.
“지금 가서 바꿔야해”
주디의 아버지는 말했다. 월급이 통장에 찍히는 순간 바로 달러로 바꿔야했다. 하루만 늦어도 벅스의 가치는 눈에 띄게 줄었다. 사람들은 신문 1면보다 암달러 환율을 먼저 확인했다.
“달러가 오늘 얼마야?”
매일 이 질문이 하루를 열었다. 공식 환율로 달러를 사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부는 개인이 살 수 있는 달러 한도를 매달 정했고, 은행의 달러 예금은 언제 동결될지 몰라 불안했다.
그러던 2020년대 중반, 젊은 손님들이 알 수 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USDT로도 환전되나요?”
처음에는 소수의 프리랜서와 수출업자들이 해외 송금을 받는 수단으로 썼다. 은행을 거치지 않아도 됐고, 환전상 앞에서 줄 설 필요도 없었다. 휴대폰 하나로 벅스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고, 필요할 때 다시 벅스로 바꿨다.
처음에 주디는 그게 자신의 일을 대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들은 여전히 현금을 원했고, 현금이 필요한 사업체도 많았다. 하지만 줄은 조금씩 짧아졌다. 젊은 손님들이 먼저 사라졌고, 그다음은 중년 손님들이었다.
2030년이 되자 월급날에도 손님이 없었다. 기업들조차 벅스를 보관할 이유가 사라지자 급여의 일부를 아예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벅스는 세금과 공과금을 낼 때만 필요한 화폐가 됐다.
2033년, 국세청이 입장을 바꿨다. 밀린 세금을 벅스로 걷는 것보다 스테이블코인으로 걷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었다. 홈페이지에 짧은 안내문 하나가 올라왔다.
“세금 신고 시 USDC, USDT 대체 납부 가능”
벅스는 여전히 있었지만 국가 스스로 자국 화폐보다 남의 화폐를 먼저 받겠다고 밝혔다.
2034년에는 재무부도 움직였다. 벅스 표시 국채는 입찰마다 유찰됐고, 결국 재무부는 달러 스테이블코인 표시 채권을 새로 발행했다. 공무원 월급도 뒤따랐다. 2035년, 일부 주정부가 공무원 급여의 절반을 스테이블코인으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벅스로만 월급을 받던 공무원들이 인플레이션에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화폐를 찍는 것도, 세금을 걷는 것도, 공무원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원래는 국가만의 권한이었다. 그 권한이 하나씩 스테이블코인으로 옮겨갔다.
2026년 5월 기준 스테이블코인 전체 시장 규모는 약 3,200억 달러, 연간 거래액은 28조 달러였다. 하루 2조 달러 이상을 처리하는 미국 도매결제망과 비교하면 3주치 거래량에 불과했다. 게다가 허수와 자전거래를 걷어내면 실제 결제에 쓰인 비중은 6%가 채 안 됐다. 나머지 88%는 거래소 안에서 트레이딩이나 담보로 맴돌았다.
문제는 그 6%가 어디서 일어났느냐였다. 시작은 뉴욕과 실리콘밸리에 있었을지 몰라도, 그 돈이 실제로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는 곳은 미국이 아니었다. 정작 미국인들은 신용카드와 은행 계좌로 아무 불편 없이 살아왔고 스테이블코인을 절실하게 찾은 건 화폐가 매일 조금씩 녹아내리는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주디는 감별기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내일은 손님이 있을까?
2. 새벽 2시, 10분 만에 청산당했습니다만
2036년, 싱가포르의 한 자취방.
오후 두 시, 알림 소리에 리아는 핸드폰을 봤다. 엔비디아 지정가 설정 알림이었다.
싱가포르 오후 두 시는 뉴욕증권거래소가 개장하지 않는 시간이다. 하지만 리아의 화면 속 엔비디아 그래프는 움직이고 있었다. 리아는 빠르게 매수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에서는 엔비디아 외에도 국채, 부동산 리츠, 데이터센터 인프라 펀드까지 한 화면에 떠 있었다.
3036년에는 주식 종목만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을 거래할 수 있었다.
“투자는 어디서든 24시간 계속할 수 있잖아.”
리아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리아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세상이었다.
2021년, 리아가 아홉 살이었을 때 미국에서는 게임스톱이라는 오프라인 게임 매장 주식이 개인 투자자들의 손에서 폭등했다. 자산의 가치보다 참여 자체가 목적이 되는 투자, 그리고 그 참여를 조직하는 건 증권사가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사실이었다.
세계경제포럼의 2025년 13개국 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30%가 성인이 되자마자 투자를 시작하여 X세대(9%), 베이비부머(6%)를 크게 웃돌았다. 사회 진출 전 투자를 배운 비율도 Z세대가 86%로 베이비부머(47%)보다 높았을 정도로 투자에 관심이 많았다.
코인베이스의 2025년 4분기 조사에서는 젊은 층의 73%는 전통적 방식으로 부를 쌓기 어렵다고 답해 기성세대(57%)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즉 새로운 세대는 투자가 당연한 활동이 됐고, 더 많은 자산에 노출되길 원했다.
2025년 6월. 애플, 테슬라, 엔비디아 같은 미국 핵심 주식을 1:1로 담보 잡은 토큰이 탈중앙화 거래소(DEX)에 쏟아져 나왔다. 국적이나 까다로운 신원 확인(KYC) 제재 없이, 지갑 주소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미국 주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됐고 레버리지는 무한정이었다.
‘내일 다시 하면 되니까.’
리아는 국경 없는 거래 플랫폼인 레밍 브라더스에 로그인하여 토큰화된 한국의 부동산 지수 상품을 매수했지만, 불과 10분 만에 청산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에 뜬 경고를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넘겨 버렸다.
리아에게 2036년의 스마트폰 알림은 마치 일상의 배경음악 같다. 끊임없이 전해지는 거래 앱의 신호를 확인하며 그녀는 다시 스마트폰을 손에 쥔다. 규제 내 거래소에서 소위 말하는 ‘안전한 자산’을 적립식으로 모아 가는 그녀의 부모님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처럼 리아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모든 가치가 자산으로 치환되어 24시간 내내 쉴 틈 없이 움직인다.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이 거대한 시장은 오늘도 끊임없이 새로운 거래를 유혹하고 있다.
3. 22억 달러가 수증기처럼 사라진 날
2036년. 판교 테크노밸리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
12년 차 인프라 엔지니어가 된 도현은 모니터에 뜬 네트워크 상태 대시보드를 스크롤하다가 손을 멈췄다. 한 화면 안에 깔끔하게 들어오는 체인 목록을 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스크롤을 끝도 없이 내려야 했는데, 이제 열 개도 안 남았네.”
도현이 엔지니어 커리어를 시작한 2024년은 그야말로 ‘레이어 2(L2) 롤업의 대항해 시대’였다. 프레임워크와 스택 코드 몇 줄만 복사해 붙이면 누구나 자기 이름을 건 독자 블록체인을 띄울 수 있던 시절이었다. 도현의 회사 역시 거대한 인프라 광풍에 올라타 검증인 노드를 구축했다.
그 체인의 이름은 ‘올체인(Allchain)’이었다. 2024년 6월, 에어드랍 기대감 속에 총예치금(TVL)이 22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회의실에서 팀원들과 맥주잔을 부딪치며 환호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 정도 속도면 우리가 이더리움처럼 커지는 거 아니야?”
하지만 상장의 기쁨은 찰나였다. 토큰이 상장되고 에어드랍 보상이 소진되자, 토큰 가격과 체인 사용률은 벼랑 끝에서 떨어지듯 떨어졌다. 보상을 좇아왔던 프로젝트와 사용자는 돈이 안 되자 올체인을 외면했고, 불과 1년 만에 예치금의 97%가 증발했다.
비단 올체인만의 잔혹한 결말이 아니었다. 당시 우후죽순 생겨났던 수많은 독립 네트워크들 역시 같은 궤적을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 인센티브라는 달콤한 보상으로 개발팀을 유인했으나, 재원이 고갈되는 순간 생태계는 순식간에 공동화되었고 껍데기만 남은 인프라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독자적인 체인을 운영하며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고정비용은 개별 프로젝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치솟는 인프라 유지비를 견디지 못한 올체인들은 하나둘 운영 중단을 선언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의 냉정한 검증을 통과해 살아남은 권력은 오직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다. 한때 세상을 바꿀 듯 기세를 올리던 수백 개의 체인들은 폐허가 된 점유율 10% 남짓의 시장을 나누어 가졌다가, 소리 없이 소멸의 길을 걸었다.
“그때는 다들 살아남아서 각자만의 거대한 생태계를 만들 줄 알았는데…”
2026년 당시 사람들은 ‘체인의 개수가 곧 블록체인의 확장성’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파편화된 체인들은 유저 경험의 단절과 보안 비용의 폭증만 불러왔을 뿐이었다. 대중이 원했던 것은 수백 개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아니라, 절대 무너지지 않는 유동성과 최적화된 속도를 제공하는 단 몇 개의 거대한 기축 인프라였다.
도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히 모니터를 닫고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4. 클릭해 줄 ‘사람의 눈’이 사라졌다
2036년. 상암동의 한 미디어 스타트업 사무실.
재훈은 우연히 다른 플랫폼을 보다가 우측 하단의 광고 배너를 보며 웃었다.
“아직도 화면에 배너 광고를 붙이고 독자를 기다리는 회사가 있다니.”
재훈의 말이 맞았다. 해당 플랫폼의 일일 방문자 수는 매달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배너 광고 매출은 나오지 않고 이러한 광고 방식은 옛날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재훈이 미디어 산업에 처음 발을 들인 2020년대 초만 해도 웹 경제의 공식은 너무나 명쾌했다. 좋은 기사를 쓰면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이면 광고주가 돈을 대며 배너를 붙였다.
“오늘 페이지뷰 얼마나 찍혔어?”
매일 아침 회의실을 열던 이 질문이 당시 미디어의 생존을 결정지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공식은 2020년대 말부터 사라졌다. 2029년 기준 전 세계 웹 트래픽의 절반 이상이 사람이 아닌 AI 에이전트와 봇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AI는 1초 만에 기사를 긁어 가 요약해 전달할 뿐, 광고 배너를 봐줄 ‘눈’ 자체가 기계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엔 대부분의 미디어처럼 봇을 막았다. 당장 폭증하는 서버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단의 대가는 잔혹했다. AI 검색과 추천 생태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하며 브랜드 자체가 잊혀 갔다. 당시 미디어사들은 큰 고민이 있었다. 봇을 막자니 트래픽이 없어지고 열어두자니 돈이 안된다.
“우리 콘텐츠, 이제 누구한테 파는 거지?”
절망적인 질문이 사무실을 채웠다. 답은 광고판이 아니라 콘텐츠에 값을 매기는 것이었다.
변화의 물꼬를 튼 건 2025년 5월 코인베이스가 공개한 ‘x402’ 규격이었다. 30년 동안 웹 표준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402번 응답 코드, 즉 ‘결제 필요(Payment Required)’ 신호를 기술로 되살려낸 것이다.
2029년까지는 에이전트 신원 검증(KYA)과 정산 절차 등 기초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진짜 폭발은 2030년, 한 미디어사가 x402 시스템으로 AI에 데이터를 직접 판매하면서 시작됐다. 실효성이 입증되자 다른 미디어와 데이터 기업들도 지체 없이 x402를 도입해 데이터 판매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몇십 원짜리 푼돈이나 만지는 짓이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하지만 하루 수십만, 수백만 건의 기계 호출이 쌓이자 통장에는 기존 배너 광고 수익을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실체적 현금이 찍히기 시작했다.
“광고주 눈치 볼 필요 없이, 기계가 제값을 내고 사 가니 회사가 돌아가네.”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아 광고를 팔던 기존 웹 광고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에이전트가 API를 거래하는 ‘기계 경제(Machine Economy)’가 본격화됐다.
재훈은 대시보드 화면을 닫고 커피 잔을 들었다. 방문자 수 그래프는 여전히 과거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수직 상승을 그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상이다. 사람이 몇 명 왔는지가 아니라, 오늘 얼마나 많은 AI 에이전트가 결제했는지 본다.
내일도 수십만 대의 에이전트가 그의 서버 문을 두드릴 것이고, 그 정직한 거래의 줄은 이제 다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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